이 길을 처음 걸은 사람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까지, 그리고 오늘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까지.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표 사진 두 장 — 왼쪽은 측면, 오른쪽은 정면. 흰 저고리에 어두운 치마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국가등록문화재 제730호) 사진을 AI로 회화적으로 재현한 이미지입니다. 원본 사진의 인물·자세·복장을 유지하고 화풍만 바꾸었습니다. 원본 사료는 저해상도 사진이며, 세부 묘사는 원본보다 상세하게 보간된 것입니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던 유관순은 3월 5일 남대문 방면 학생 연합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3월 10일 전국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그는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고향 천안으로 돌아왔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모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마을 어른 조인원과 함께 이 시위를 주도했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주민들이 들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열아홉 사람이 순국했다. 그 가운데 유관순의 부모가 있었다.

1919 ~ 1920

재판과 옥중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함께 재판받은 이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신애·어윤희와 함께였다. 삼천여 명의 수감자가 호응했고, 함성이 담장 밖까지 퍼져 전차가 멈추고 기마대가 출동했다.

1920년 9월 28일

순국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가 원인이었다. 만 열일곱이었다.

일제는 시신 인도를 거부했다. 이화학당 교장 월터가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항의하자, 조용한 장례를 조건으로 인도했다. 10월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묘는 미아리로 옮겨졌고, 끝내 유실되었다. 지금 생가 뒷산 매봉산에 초혼묘가 있다.

그리고 오늘

대회는 천안에서 열린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 천안시 병천면에 추모각이 세워졌고, 1991년 생가가 복원되었다.

대회는 그가 나고 자란 천안에서 열린다. 출발선은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관순」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초상 이미지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국가등록문화재 제730호) 사진을 AI로 회화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원본 사진의 인물·자세·복장을 유지하고 화풍만 바꾸었습니다. 원본 사료는 243×350 저해상도 사진이며, 세부 묘사는 원본보다 상세하게 보간된 것입니다. 실존 인물이므로 얼굴 생김새를 미화하거나 변형하지 않았고, 원본 사료 사진과 대조 검수를 거쳤습니다.